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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Feb

만능 램프

작성자: 4rum세이로 IP ADRESS: *.235.35.59 조회 수: 521

 다섯 번째 칼마저 부러져버렸다.

 나는 익숙해진, 무미건조한 아쉬움을 느꼈다. 이번엔 좀 손에 익었나 싶더니. 나는 반쯤 꺾인 칼 손잡이를 대충 던져 버리고 다음 칼을 쥐었다. 그리고, 더 이상 칼을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칼을 쓸 상대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가 슬슬 잠에 빠지려 할 때쯤 시작된 지독한 싸움에 질려서 줄행랑을 쳤던 햇님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악취미군. 싸우는 과정을 보지 않으려면 끝까지 관심 두지 말 것을, 결과가 궁금해져서 이렇게 돌아오다니. 그래도 그 겁쟁이에게 한 가지 장점은 있었다. 자기가 보는 광경을 남에게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게 훨씬 더 한 악취미일지도 모른다. 글쎄, 그 자신에게 악의는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무서워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곁눈질로 바라보느라 어슴푸레하게밖에 비출 수 밖에 없는 햇님이 보여준 시체들을 본 나는 아무튼 그렇게 느꼈다. 허무하군. 나는 여섯 번째 칼도 던져버렸다. 그리고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칼도. 아, 이건 좀 아깝군. 세상에 두 자루밖에 없는 명검이었던가.

 칼을 버리면 조금 후련해질까 생각했는데, 왠지 손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허전함만이 느껴졌다. 몇 명이나 내 손으로 죽였지? 칼 하나에 열 다섯 명? 스무 명? 글쎄, 그것보다 더 많이 죽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내 손에 죽지 않은 자들까지 합치면 도대체 여기서 몇 명이나 나자빠진 걸까. 뭐, 어차피 굳어버린 머리로 생각하기 싫은 주제이기도 하고. 여기서 죽어간 사람이 스무 명이든 백 명이든 딱히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이 생각은 그만뒀다.

 나 는 시체들이 줄을 서듯 이어진 길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고, 그 끝에는 내 닳아빠진 신발 코가 있었다. 찢기고, 베이고, 할퀴어지고, 풍화한 신발이었다. 나는 멀쩡했지만, 신발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조용히 신발을 벗어서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보면, 이 신발을 준 녀석도 죽었지. '우리의 신념을 위해서' 말이다. 신념? 웃기지도 않는다. 내가 베푼 가짜 친절과 내가 열변한 가짜 신념에 이끌린 머저리들 중에서도 결국 그는 가장 선두에서 웃으며 죽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헛된 짓이었다.

 그럼 내 진짜 목표는 뭐였더라? 아, 그래. 요술 램프를 찾는 거였지. 요술 램프라.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악의적인 이름이었다. 문지르면 요정이 나와서 세 개의 질문과 한 개의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램프. 그게 하필 램프인 이유는 몰랐지만, 어쨌든 '성스러운'이나 '마법의', 혹은 '기적의'가 아니라 '요술'이라고 이름붙인 것도 이해가 간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자들에게, 아무런 댓가도 없는 힘을,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곳에 놓아둔다면 그것은 필시 피를 부르기 위한 제물일 것이었다. 실로 요망한 목적이었다.

 그 요망한 목적을 반 쯤 이루어 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지. 나는 시선을 돌렸다. 허름한 자연동굴이 무성한 잡초만을 키우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저렇게 초라한 동굴이라니. 정말, 멋을 모르는 요정 놈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잡초를 헤치고 동굴 안을 천천히 걸어갔다.

 동굴 안은 의외로 밝았다. 지금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서 버린 햇님이 더욱 과감하게 떠올라 버린 탓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렇게 밝을 수는 없었다. 이것도 요술 램프의 소행인가.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석회동굴이 아니었는지 동굴에는 그 흔한 종유석이나 석순 따위의 장애물도 없었다. 그야말로 일방통행, 속도감을 조절하지 않으면 발을 헛디딜 정도로 쉽고 평탄한 내리막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피곤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더라. 나는 단지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여동생과 함께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이다. 부모님이 죽은 뒤로 유일한 가족이었던 여동생이 덜컥 불치병에만 걸리지 않았어도 쓸데없이 요술 램프같은 데에 관심두지 않고, 거짓 동료들의 목숨과 거짓 적들의 목숨을 취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봐야 쓸데없는 일이다. 나는 내리막을 내려가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동굴은 의외로 짧아서, 다리가 아프기도 전에 내리막이 끝나고 문 달린 공동이 나타났다. 문이라고? 이것 참, 나는 혀를 끌끌 찼다. 하는 김에 끝까지 환영해준다는 건가. 나는 싫은 예감을 느끼면서도 문을 열었다. 어쨌든 죽어간 놈들의 핏값은 해야 하니까. 그리고 겸사겸사 여동생 일도 해결하고 말이다.

 문을 열자 소박한 다락방 같은 느낌의 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방의 중앙에는 상자가 있었다. 램프 하나쯤 들어갈 만한 크기의. 거무튀튀한 나무 상자에 내 피에 절은 손을 얹자 묘한 대비감이 들었다. 나는 고민 없이 상자를 열었다.

 거 기에는 램프가 있었다. 그것도 불 켜는 램프가 아니라, 주전자 같기도 하고 술 따르는 병 같기도 한 묘한 모양의 램프가. 나는 램프를 문질렀다. 모든게 끝이었다. 이제 나는 거짓말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젠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화가 난 나는 램프를 세게 걷어찼다. 램프는 퍼석 하는 힘없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것은 도자기 수준도 못 되는 흙 접시일 뿐이었던 것이다.

 실로 허무한 일이었다. 나는 여기 왜 왔던 걸까?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곧장 그 길로 동굴을 나왔다.

 동굴 밖에 나오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그렇게 긴 길은 아니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흐른 걸까. 동굴 앞은 한산했다. 그야 당연하지, 거짓 램프따위가 숨겨진 동굴에는 아무도 올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주인 잃은 신발 한 짝이 보였다. 닳아빠진 신발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찢기고, 베이고, 할퀴어지고, 풍화한 신발이었다. 이건 누구의 신발이지? 뭐, 잘 되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신발도 신지 않고 여기에 왔던 것이다. 맨발로 걸어가기엔 좀 찜찜했기에 나는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와서 느낀 것은 피곤함과 쓸쓸함이었다. 집은 혼자 사는 내가 쓰기엔 좀 지나치게 넓었기에, 그 쓸쓸함은 더 했다. 두 개의 방 중에 사람이 쓰는 방은 하나였으므로, 나는 곧장 침대에 누웠다. 이럴 때는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나서 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헛수고를 한 밤에는 왠지 감상적인 생각이 들어서 더 견딜수가 없었다. 여동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좀 나았을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이불을 덮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울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런데 나는 왜 울었을까? 글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의 연속이었다. 나는 내일 하루는 뭔가 달라지겠지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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